훈구 vs 사림 — 두 정치 세력의 등장
조선 건국의 공신 집안에서 나온 훈구파와,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사림파. 15세기 후반부터 두 세력이 부딪치기 시작했다. 누가 진짜 유교적 통치를 펼칠 자격이 있는가?
훈구 (기득권 · 친조선 건국파)
15세기 조선의 지배층. 건국·세조 정변 등에서 공을 세운 가문들.
- 건국·세조 정변의 공신 출신
- 대농장과 노비 보유 (사실상의 권문세족 재현)
- 실무에 능통하고 부국강병 추구
- 훈민정음 반대(한자 옹호)
- 대표 — 정인지·신숙주·한명회·정창손
사림 (재야 · 성리학 정통파)
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. 정몽주·길재의 계보를 잇는 학파.
- 정몽주 → 길재 → 김종직 → 조광조의 학통
-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서원·향약으로 자기 기반 마련
- 왕도 정치·도덕 중시
- 훈구파의 권력 독점 비판
- 대표 — 김종직·조광조·이황·이이
사림은 어디서 왔나? — 정몽주의 후예
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둘로 갈라졌을 때, 온건파 정몽주·이색이 죽음을 당하면서 그 제자들은 정치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흩어졌다. 그들이 다음 세대(길재·김종직)로 이어지며 "사림"이라는 학파를 이룬 것. 즉 조선의 사림은 고려 말 정몽주의 정신적 후계자들이었다 — 그래서 더더욱 "정통 유학자"임을 자부했다.
네 번의 피의 사화 (1498~1545)
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과 기득권 훈구의 충돌. 1498년 무오사화부터 1545년 을사사화까지 — 약 50년 간 네 번의 거대한 정치 숙청이 벌어졌다.
⚔️ 4대 사화 (士禍) — "선비의 화"
무오사화
김종직의 「조의제문」(세조의 단종 폐위를 비판)이 빌미. 김일손이 사초에 이 글을 실으면서 발각 → 김종직 부관참시·김일손 등 사림 처형. 첫 사화.
갑자사화
연산군의 생모(폐비 윤씨) 사사 사건이 빌미. 연산군이 친정 후 훈구와 사림 모두 대거 숙청. 폭정의 절정 →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 폐위.
기묘사화
조광조의 급진 개혁이 빌미. 현량과 도입·소격서 폐지·위훈 삭제 등 → 훈구의 반발 → "주초위왕(走肖爲王)" 음모로 모함 → 조광조 사사. 사림의 최대 패배.
을사사화
중종의 외척 윤원형(대윤·소윤 두 파벌) 다툼. 윤원형이 권력 잡고 윤임 등 사림 처형 → 외척의 발호가 본격화. 그러나 이미 사림은 지방에서 다시 자라고 있었다.
"4년의 폭풍 — 그리고 38세의 죽음"
조광조(1482~1519)는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다. 김굉필의 제자로 사림의 차세대 리더. 1515년 중종이 그를 등용하자 4년 만에 거센 개혁을 펼쳤다.
① 현량과 도입(1519) —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인재를 천거로 뽑는 제도. 사림이 대거 진출.
② 소격서 폐지 — 도교 제천 의식을 행하던 관청. 유교 정통주의 입장에서 폐지.
③ 향약 보급 — 향촌 자치 규약. 사림의 지방 기반 강화.
④ 위훈(僞勳) 삭제 — 중종반정 때 공신 명단에 부정하게 끼어든 자들의 공훈 박탈. 훈구의 심장을 찌른 것.
그러나 조광조의 죽음은 사림의 끝이 아니라 전설의 시작이었다. 이후 사림은 그를 "기묘사화의 순교자"로 기리며 지방에서 더 단단한 기반을 다졌다. 결국 16세기 후반 선조 시기 사림이 정치를 장악하게 된다.
사림의 성장 — 서원과 향약, 그리고 이황·이이
중앙에서 거듭 패배한 사림은 지방으로 돌아갔다. 그러나 빈손은 아니었다 — 그들에겐 서원·향약이라는 두 도구가 있었다. 16세기 후반, 사림이 마침내 조선의 주류가 된다.
📚 사림의 두 무기 — 서원과 향약
서원 — 유학자의 학교
지방에 세운 사립 교육·제사 시설:
- 1543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(고려 말 성리학자)을 모신 백운동 서원에서 시작
- 이황이 명종에게 청해 소수서원(왕이 이름을 내림 — 사액서원)
- 유학자 제사 + 후학 양성
- 사림의 학문·정치 네트워크로 발전
- 1570년경 47개 → 18세기 700개 이상
향약 — 향촌의 헌법
지방 자치 규약:
- 4대 강령 — 덕업상권·과실상규·예속상교·환난상휼 (도와 권하고 잘못은 함께 고치며 좋은 풍속을 가르치고 어려움은 함께 돕는다)
- 중종 때 조광조가 보급 시도
- 이황·이이가 향촌에 맞게 수정
- 사림이 향촌을 장악하는 도구
- 유교적 도덕 질서를 일상으로 확산
🌟 사림의 두 거두 — 이황과 이이
1568년 선조에게 올린 글
"전하, 학문을 닦으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(敬)입니다.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흩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 — 그것이 임금의 첫 번째 덕입니다. 신이 이 열 폭의 그림으로 학문의 길을 정리하오니, 매일 한 폭씩 보시며 마음을 가다듬으시기를 청합니다."
— 이황 『성학십도』 (1568)이황과 이이 — 동아시아 유학 사상의 두 봉우리
이황과 이이의 사상 논쟁(사단칠정 논쟁)은 16세기 동아시아 유학 사상사의 가장 깊은 논쟁이다. 이황의 학통은 일본 에도 막부의 유학(후지와라 세이카·하야시 라잔)에 직접 영향을 주었고, 그의 호 퇴계(退溪)는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고도 한다. 이이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으로 이어진다 — 박세당·홍대용·정약용 등이 그의 영향. 두 사람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한국 인문학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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핵심 정리
- 15세기 후반 조선의 두 정치 세력: 훈구(건국·세조 공신, 대농장) vs 사림(정몽주→길재→김종직 학통, 성리학 정통).
- 4대 사화(1498~1545): 무오사화(김종직)·갑자사화(연산군 폭정)·기묘사화(조광조의 급진 개혁)·을사사화(외척 다툼).
- 조광조의 4년 개혁 — 현량과·소격서 폐지·향약·위훈 삭제. "주초위왕" 음모로 38세에 사사.
- 사림의 두 무기: 서원(주세붕 백운동→소수서원·도산서원 등) + 향약(덕업상권·과실상규·예속상교·환난상휼).
- 16세기 후반 선조 즉위로 사림의 시대 시작. 이황(주리론·영남) vs 이이(주기론·기호). 1575년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동인·서인의 붕당 시작.